개척자들이 있었기에 혁신은 가능했습니다.

1905년 국가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라는 부친의 가르침에
9살의 어린 소년은 샌프란시스코를 향한 한 달여 간의 항해를
시작으로 세상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일제 치하에 생존만이 전부였던 이 땅을 떠난 그곳에서
유일한 박사는 일상의 가난과 평범해진 고난에
안주하지 않을 지식과 리더십을 쌓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신념을 확고히 하게 됩니다.
14년의 학업은 미래개척의 기반

리더의 자질을 갖춘 유능한 인재로 성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Dr.New는 반복된 훈련과 정신력으로 체력의 열세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스스로를 단련시켰습니다.
그는 센터포워드와 쿼터백 포지션을 맡으며 주장으로 활약하였고,
이를 통해 선수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Dr.New는 토론과 웅변에도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대중에게 호소력과
설득력을 갖는 것은 인생에서 큰 자산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Dr.New는 “운동선수로서의 투지와 기질이 후일에 어떠한
난관도 뚫고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또한 사람들과 함께
협력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자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 바탕이다.”
라고 회상합니다.


조국과 국민을 위한 애국적 충정이라는 신념을 확립시켰고,
그는 평생에 걸쳐 그 신념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진정한 민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현실에 눈을 뜨고 14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인소년병학교에 자원 입대할 정도로 그는 애국심이 투철했습니다.
삶의 가치 순위를 첫째 ‘국가’, 그다음을 ‘교육’, ‘기업’, ‘가정’, 으로 두었던
그의 신념처럼 자신이 헌신해야 할 국가를 위해 현장에서 실천하는 독립운동가로,
사업의 자리에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을 위한 애국 기업가로서 활동했습니다.
애국은 실천임을 몸소 보여준 민족운동

유능한 기획자이자 스토리텔러였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었던 그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지금도 우리의 본보기가 됩니다.

번화가 한복판에서 교통사고로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수백 개의 유리병이 도로 가운데로 쏟아져 내렸고,
깨진 유리 조각 때문에 도로는 순식간에 마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다음날 신문에까지 보도가 되었는데
<숙주나물 차량의 교통사고. 유리병 수백 개 흩여져 한때 교통마비.
숙주나물은 중국 음식인 만두의 불가결한 재료>라는 기사 제목 밑으로
도로에 가득한 깨진 유리병과 숙주나물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 신문 기사는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되어 지금까지 숙주나물 가게를
모르고 있던 사람들까지 Dr. New의 가게를 알게 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일로 숙주나물 주문은 두 배, 세 배로 늘어 사업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숙주나물 유리병 용기에서 통조림 용기로 개발하게 되는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하게 됩니다. 트럭 사고를 기사화한 유일한 박사의 바이럴 마케팅은
사업이 확장되는 중요한 전략이었습니다.
아이디어, 이것이 기업에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소비자 중심의 마케팅
광고를 전략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의약품을 취급하던 유한양행의 첫 광고가 염료광고였던 이유도
농사를 짓는 국민이 쉽게 더러워짐에도 불구하고, 흰색 옷을 입고
생활하던 비효율적 환경을 개선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제품을 넘어 국민의 삶에 도움을 주기 위한 유일한 박사의
진심 어린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고 그 마음을 광고에 얹어
소비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던 유일한 박사의
마케팅 전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역사입니다.
그는 시대의 마케터이자 진정한 스토리텔러였습니다.


그것은 곧 유일한 박사와 기업의 신념이었습니다.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의 지속가능성과도 맞닿아 있는 유일한 박사의 사회적 책임이
밑바탕이 된 경영철학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울림이 있는 영감을 가져다 줍니다.
헌신을 위한 민족 사업

불리길 바라던 유일한 박사는,
개인보다 국가와 교육을 우선시하는
진정한 교육자였습니다.

Dr. New에게 기업 활동은 그 자체가 교육사업이며,
공익사업이었습니다. 귀국 후부터 시작된 개인적인 장학,
공익사업은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든 1953년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1952년 고려 공과 기술 학원을 설립하고
1960년대에는 유한 중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항구적인 교육장학, 사회원조사업을 위해
유한양행 주식 등 자신의 재산을 출연해 1970년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 및 유한학원)’을
발족하였으며 유언장을 통해 전 재산을 기증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유일한박사.
그가 떠나고 남긴 유언장은 신문에
대서특필 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모두가 그의 신념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첫째,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First, granddaughter is given 10,000 dollars in tuition until she graduates from college.
둘째, 딸에게는 유한공고 안의 묘소와 주변 땅 5000평을 물려준다.
(딸, 유재라 여사도 타계 후 유한동산을 포함한 당시 200억 원대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
Second, the daughter is given a burial area in Yuhan High School and land nearby.
(Daughter, Mrs. Yoo Jae-ra also returned all her assets to society, including the limited property)
셋째,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 및 유한학원)에 기증한다.
Third, my (Dr. New’s) 149,941 shares of company are to be given back to the society and
are to be donated to the foundation (now Yuhan Foundation and Yuhan Academy).
넷째, 아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Fourth, my son, you have graduated from college, so live on your own from now on.
- 유일한 박사 유언장 중(From Dr. New’s will) -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유일한 박사의 숭고한 정신과 의지를
유한건강생활이 이어갑니다.
